내릴 때가 되어서는 비야 그치렴
月
미용실 예약을 미루기로 결정한 것이 다행이었습니다. 나는 꽤나 피곤한 상태로 눈을 떴고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해가 다 뜨도록 눈을 끔벅이는 일 밖에 없었습니다. — 산을 마주보는 방이기에 해를 보지는 못했지만 시간 상 그렇다는 말입니다. 침대에서 나온 것은 3시였습니다.
방에서 무언가를 하지 않는 것이 습관이 되었고 나는 밖을 쏘아다니기 시작합니다. 동아리방에 늘어져있으면 동기가 뉴비들을 대상으로 진행하는 세미나를 하겠습니다. 나는 귀 틈으로 들려오는 강의 너머로 밀린 가계부를 정리했고 청축 키보드 탓에 타닥거리는 소리가 세미나를 방해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가계부를 정리하는 까닭은 나의 소비 행태를 살피기보다 정산을 하기 위함이고 글을 쓰는 것은 뿌듯함을 얻기 보다 끊기지 않겠다는 의지 때문이겠습니다.
오늘도 야식을 먹으면서 출국할 때 까지 당분간 야식이 없음을 선언하지만 이가 지켜지지 않음을 아는 입장에서 글을 써내립니다.
火
윤도는 편도절제술을 겪었고 나는 때에 맞추지 못한 안부 인사를 보냈습니다. 수술은 잘 끝났냐고. 아는 것이 더 무섭다고 수술을 앞둔 윤도는 불안을 떨었습니다. 다행히도 나의 안부에 답장이 실렸고 뜬금 없는 어휘에 나는 몇 초간 멈춰 서있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아니 사실 뛰어다녔습니다.
현이에게 다니는 미용실을 바꾸고 싶다고 말해놓고서는 아직도 변경하지 못했습니다. 라포를 형성했다는 표현이 미용사와의 관계에서도 잘 적용될 수 있을까요. 처음 보는 미용사에게 나의 요구 사항을 잘 말하지 못하는 내향성이 있습니다. 충분히 라포가 형성된 관계에서도 요구 사항을 제대로 말하지 못해서 마음에 들지 않는 머리가 나왔는데 옮기는 데 공포를 느끼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 아닌가요. 하지만 윤도는 눈썹이 보이는 기장이 더 어울린다고 말해주었고 나는 또 금방 흔들려 수긍하였습니다.
나는 툴툴거리는 걸음으로 카페 너울로 향했습니다. 내가 잠에 취한 사이에 부우는 내가 너울로 나올 것을 결정했고 그렇게까지 달가운 선택은 아니었습니다. 예상치 못한 사람도 함께 있었습니다.
라스베이거스 여행 계획을 세우려고 했지요. 후배의 비행기 시간이 조정됨에 따라서 약간의 불안이 생겼지만 무시하기로 했습니다. 투어를 선택하고 식당을 예약했습니다. 분수를 보면서 식사를 하기 위해 175달러를 써야한다니 불합리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일정 중에 한번은 불합리한 행동을 하고 싶었습니다. 옷에 크게 관심 없는 대학생들에게 꽤나 박한 드레스코드임을 조금 더 빨리 알아챘어야했는데 말이죠.
약간의 시간을 빌려 랩미팅을 준비했습니다. 생각은 많았지만 한 것이 없음을 슬라이드로 꾸며내는 일은 특히나 어렵지만 지금까지 많이 해왔기에 전문적으로 해낼 수 있습니다.
학식을 먹으면서 지출을 되돌아보았고 11월에 대만에 갈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습니다.
水
랩미팅이 온라인으로 진행되었기에 나는 방에서 참석하였고 내 동기들이 나를 그리워하는 지경입니다. 내 슬라이드를 한점 부끄럼 없이 제시하는 것도 능력로 인정해주기를 바랍니다.
꼬질한 상태로 점심 식사를 즐긴 후에 본격적으로 나갈 준비를 하려고 했으나 높아진 혈당은 잠을 부르기에 충분했습니다. — 혈당 때문인지 확신은 없으나 그렇게 믿기로 했습니다. 잠깐 눈을 붙였다고 생각했을 때 17시였고 나는 이제라도 연구를 수행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새벽 1시에 교수님께서는 8시간 후에 미팅에 참석할 것을 이야기하셨고 영어 발표가 섞인 미팅임을 깨달았을 때에는 포기의 감정이 앞섰습니다.
木
아침 9시에 미팅에 참여하였으나 두시간을 멀뚱히 지켜만보았고 나의 주제가 찾아왔지만 변질되어가는 토론에 교수님은 나를 내보냈습니다.
늦게나마 랩 스터디 세션에 참여했습니다. 세미나실에 도착했을 때 꽤나 형식적인 행보에 가까웠음을 깨달았고 동기들과 함께 학식이나 먹기로 결정했습니다.
어디로든 떠나고 싶은 심정에 나는 탈출을 감행했습니다. 병원은 핑계였어요— 미안합니다.
교통수단에서 코딩을 즐겨 했었는데 요즘은 그러지 않습니다. 그 시간에라도 쉬고 싶어졌습니다. 나는 대신 유튜브를 돌려보며 라스베이거스에서 먹을 거리들을 구글 지도에 표시했습니다. 폐업한 가게들이 외로워보여서 몇 추가해두었습니다.
부끄럽게도 나는 집에서 잘 쉬고 있던 아빠를 터미널로 불러냈습니다. 두 번 움직이기는 싫었던 아빠 탓에 꽤나 이른 시간에 저녁을 먹게 되었고 메뉴는 평양냉면이었습니다. 집 근처에 있는 줄 몰랐던 것은 평양냉면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었겠지요. 아빠에게 첫 평양냉면이었기에 맛이 괜찮기를 기도했지만 달랑 고기 두 점에 아쉬운 육수 맛에 이게 진짜 평양냉면인가 고민했습니다.
나는 아빠에게 롯데백화점 앞에서 내려줄 것을 요구했고 자라에 가게 될 줄 알았다면 그러지 않았을 것입니다. 세일 기간임을 떠올린 나는 무엇이든 건지고 싶은 마음이었습니다. 윤도는 영상통화의 형태로 나와 함께하였고 우리는 괜찮은 바지를 구입할 수 있었습니다.
이 탓에 스타벅스 2층 구석에 앉아있는 훈이를 발견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소요되었습니다. 카페 직원들이 손님들이 나가기를 기도하기 직전에 빠져나왔습니다. 시민공원에 가자. 굶주린 탓에 편의점을 떠돌며 산책하던 우리는 비를 마주했고 결국에 내 종이 가방은 찢어지고 말았습니다.
버스에서 내릴 때에는 비야 그치렴. 열대의 날씨는 야속하게 소원을 들어주었습니다.
金
계란물을 입힌 스팸만 있어도 점심이 맛있을 수 있구나를 집에 올 때마다 깨닫습니다. 식후에 누우면 안된다던데 중독성이 심합니다. 카페에서 일하려는 마음은 저 멀리에— 16시에나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아빠 토너가 없다. 엄마가 말했습니다. 올리브영에 들렸지만 머리 깐 게 더 낫다는 윤도의 말만 기억났습니다.
스타벅스 쿠폰이 있길래 내 돈 주고 사먹지 않을법한 메론 음료를 주문했습니다. 크림이 올라간 모양새를 기대하지는 않았는데. 과하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맛있게 빨아먹었습니다.
데이터셋을 구축하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Poetry가 말썽을 부리는 탓에 어제 코드를 돌리지 못했습니다. 다시 살펴본 코드에는 바로잡을 구석이 있었고 괜히 API rate limit를 낭비하지 않게 되었음에 감사했습니다.
그외에도 저장 포맷을 바꿔야겠다는 직감이 있었습니다. JSONL로 쌓은 데이터는 언젠가 꼭 나의 발목을 잡을 것만 같았고 나는 HF Datasets를 쓰기로 결정했습니다. 특정 프레임워크에 나의 데이터가 묶이는게 꼴보기 싫었지만 바퀴를 새로 만드는 것은 더더욱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엄마는 짜지 않게 김치찜을 준비해두었고 나 때문에라도 그때 그때 새 김치를 담궈야겠다는 이야기를 늘어놓았습니다.
土
작은 식탁을 TV 앞에 꺼냈습니다. 남은 김치찜과 스팸을 데우면서 눈은 유튜브를 향해 있었습니다. 역시 큰 화면이 좋긴 좋구나 생각하면서 집을 돌아다녔습니다. 어차피 아무도 뭐라하지 않겠지요 설거지는 하지 않아. 안방 침대에서 뒹굴다가 거실 바닥에도 누웠다가 결국은 — 아빠 방이 되어버린 — 나의 방에 도착해 잠에 듭니다.
약간의 거짓이 섞여있더라도 이해해주기를 바랍니다.
다 지나가버린 복날이지만 그거 챙겨볼거라고 우리 가족은 치킨을 두 마리 샀습니다. 엄마는 술을 사는 부자를 타박했지요.
약간의 취기에 받아든 PR에 나는 분노했고 윤도는 나를 위로하려 노력했습니다.
日
밀린 기록을 정산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나는 윤도와 함께한 시간을 적어나갔습니다. 4만보를 모두 마무리하는데에는 꼬박 3시간이 걸렸습니다. 평소보다는 약간 더 눌러쓴 글을 출판했고 그를 받아든 윤도는 답장을 택했습니다.
도탈을 감행하고 있습니다
이륙한지 3시간이 되었습니다. 이 또한 특이한 모양의 탈출이라고 부를 수 있겠지요. 2주 전의 나는 탈출을 원했고— 소망이 변하지는 않았습니다.
권민재